기억을 가두는 자

아롱님 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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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ack Summer with Grim & Yu ]


“도저히 이해가 안 가.”

남성은 불만스레 이야기했다. 불퉁한 목소리와 더불어 한껏 부풀어 오른 볼이 가득한 불만을 증명했다. 더불어, 그는 가지고 있는 목걸이를 가지고 가볍게 손장난도 쳤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곱게 세공된 은색 줄을 끼워 넣는 듯하면, 검지 손가락에 올린 보석을 빙글 돌려버리기도 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성음의 간극을 간헐적으로 채웠다. 그러나, 맞은 편에선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는 결국 목걸이 줄을 서로 비비던 것을 그만두고 동그란 펜던트를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한참 낮은 책상에 턱을 괜 채, 그는 금색 펜던트의 중앙에 박혀 있는 푸른 보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달빛을 맞아 보석은 여러 갈래로 빛을 반사했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빛나는 모양새가 달라, 그는 한참 손가락을 움직였다.

“왜 이런 걸 만드는 거야?”

그는 한쪽 눈을 미세히 좁혔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들어왔던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올곧은 자세로 보석을 매만지고 있었다.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어, 보석을 만지는 모습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보석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 법했다. 그러나, 남성은 그것 역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보다 지금 보석이 더 중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아니지, 왜 이런 걸 지키는 거야?”

그는 결국 입술까지 비죽 내밀고는 부러 세게 들고 있던 펜던트를 내려놓았다. 책상이 부서질지, 보석이 먼저 부서질지 확인하는 그 모양에 그제야 보석을 바라보고 있던 여성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암흑을 뽑아 만든 듯 둥그런 눈동자 안에 드디어 제가 들이치자, 남성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순한 양이 따로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만지려 했다. 지금껏 제가 만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빛나는 보석이 두 눈에 존재하는 것 같았기에. 그러나, 손은 채 목적지에 채 닿지 못했다.
철컥, 하는 묵직한 금속의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한기가 닿았기에.
총구였다. 쥐고 있는 얄따란 손가락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새카만 그것은 분명 흉기였다. 자세히 보니 경찰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이었다. 분명 이번 일을 기획하면서 그들이 보석 세공사에게도 하나 쥐여준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훌륭한 계획이었다. 뒷걸음질로 잡았는지, 혹은 편견에 취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괴도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푸른 눈의 괴도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기실, 보석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를 만들어낸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는 중이지 않은가.

“물러서, 그림. 쏘는 방법도 배웠으니까.”
“누가 알려준 거야, 대체?”
여성, 유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순순히 답했다.
“보스턴 경찰국의 윌 씨가.”
“오늘은 그 집을 털어야겠어.”
“그림!”

호령에 그림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미국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고 기어코 원하는 것을 훔쳐내고 마는 보스턴 대 괴도의 명성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소리였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썩 마음에 들었기에. 세간이나 경찰이, 윌이 듣자면 목덜미를 잡을 소리겠지만, 현재 그림은 유우라는 한 명의 인물에게 사족을 못 썼다. 그녀가 수갑을 채워준다면, 가만히 앉아있을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유우가 아닌가. 그는 유우가 하는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다만, 단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여전히 보석을 만들어 내어 미술관에 전시해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가 보석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차피 제 손에 들어올 물품을 자꾸만 다른 사람의 눈앞에 들이미는 이유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보석이 얼마나 아름답든 누가 만들었는지 따위는 금세 잊어버리고 말 터인데. 그럴 바에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제게 바로 보여주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그림은 총구를 앞에 두고 고개를 슬 기울였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너를 좋아한다구, 유우.”
낯 뜨거운 소리를, 그는 편안히도 뱉었다.
“그게 내 보석을 훔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익숙한 모양인지, 유우 역시 이를 편안히 받아쳤다. 그러나, 귀끝이 슬쩍 발개지고 만 것을 그림은 채 발견하지 못하였다.

“상관이 있지. 난 네 모든 걸 갖고 싶은 거라구.”
“내 행복을 포함해서?”

부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구석을 찌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림이 유우를 찾아온 것이 벌써 열 번이 넘어가니, 그림이 그녀를 아는 만큼 유우도 그를 알았다. 제 앞에선 매사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없다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어도, 본래 어떤 공간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화려한 장치와 수려한 외모, 근사한 복장으로 세간에서는 ‘대 괴도’라 칭해지고 있는 그였으나, 결국엔 범죄자다. 경찰을 상대하는 이들의 특징은 범인과 다르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의 낯빛은 금세 굳어졌다. 그를 화사하게 비추던 달빛도 이 순간만큼은 푸른 눈이 스산하게 빛나도록 도왔다. 입술이 비뚜름한 선을 그리자, 유우는 들고 있던 총을 꽉 쥐었다. 총을 받을 때부터, 정말 쏠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으나,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그녀는 방아쇠에 살그머니 검지 손가락을 올렸다. 노리쇠는 일찍이 뒤로 당겨진 후였다. 그새 그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이밀어 총구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꼴깍, 저도 모르게 침이 삼켜진다.

“아닌 거 알잖아. 상처받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나, 그림은 손을 뻗지 않았다. 내쳐진 후엔 도전도 하지 않는다는 듯, 가만히 손을 내렸다. 그는 다시금 입술을 비죽 내밀고만 있었다. 마치 정말로 상처라도 받았다는 것처럼. 눈썹은 아래로 내려가는 직선을 그렸고, 동그랬던 눈은 금세 반달처럼 접혔다. 유우는 그 순수한 얼굴에 놀라 어깨를 굳혔다. 이런 얼굴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누그러진 그녀의 기색을 먼저 알아챈 것은 그림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알아채는 것은 그림에게 있어 식은 수프를 한 스푼 떠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커져 버린 눈동자, 슬그머니 내려온 손가락. 괴도는 틈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는 빠르게 거리를 좁혀, 유우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뜩 놀라 총구를 재조준했을 때는, 이미 고양이 한 마리가 창문을 타고 넘어간 후였다. 유우는 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망토 조각도, 그녀의 펜던트도,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녀의 방엔 그저 시원한 웃음 소리와, 달아오르고 있는 체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여름밤의 바람이 커튼 자락을 치고 들어왔다. 유우는 전혀 시원해지지 않았다.
다시는 오지 마! 오늘도 소리는 속으로만 질러야 했다.

푸땍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