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ante

아롱님 글 커미션
[소원을 이뤄주는 호수]와 이어집니다.
https://twisted-dream-land.tistory.com/m/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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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mance Fantasy of Grim & Yu ]

그림은 아침부터 저 모양이었다. 아예 상체를 탁상에 꼭 붙일 것처럼, 두 팔을 최대한 늘어지게 뻗고는 고개를 팔 중간에 묻었다.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귀는 뒤로 접혀 있었으며, 풀어진 상체에 힘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던 누가 보면, 결코 그의 신분도 짐작지 못한 모양새였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저 얼굴, 저 불량한 각도! 기분 좋게 살랑이던 꼬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망토 아래로 사라진 길쭉한 꼬리 끝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때문에 어깨에 두른 남색 망토만이 잔뜩 구겨져 사방으로 갈라진 채 흘러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조막만 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는지, 웅크려 있는 본인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저 뒤를 지나가는 사람들만이 위엄도 경탄도 사라진 그의 작태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하였을 뿐이다. 쪼그려 있는 그 모양 하나로도 이곳은 벌써 길거리 술집 내지 어린 영식의 놀이터가 되었다. 제국에서 지혜로 따지자면 가장 위인 이들이 모이는 ‘마법사의 탑’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이, 그림의 세 발자국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마법사 로이가 오늘에 와 한숨을 열 번째 삼키는 이유였다. 그는 한 아름 서류 뭉치를 안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높이는 쌓여만 갔다. 서류의 높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법사라면 모두 알았기에, 그들은 안쓰럽다는 얼굴로 로이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 갔다.
기실, 그림이 로이를 괴롭히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고의성이 짙지 않아 괴롭힌다는 말은 어폐일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림의 비서 마법사로 일하며 로이는 괴롭지 않은 날을 손에 꼽았다. 본래 천재는 죄다 괴짜들뿐이라더라. 마탑은 대대로 제국에서 골칫덩이 집합소라 불려 왔기에, 로이는 마법사들의 기행에 어느 정도 익숙했다. 그러나, 그림의 그것은 도를 넘었다. 생각이 넓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만큼 더 큰 사고를 저지를 수 있는 걸까? 로이가 한 사건을 수습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고가 옆구리에 얼굴을 비벼왔다. 로이는 자신이 지금껏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필시 신이 가련한 어린양 하나를 품으려 인간들의 세계에 친히 손을 뻗으셨기 때문이리라. 바깥에서 그림의 다른 이름을 ‘세기에 한 번 나올만한 천재 대마법사’라 하더라. 그러나, 마법사의 탑에서 그림의 다른 이름은 ‘세기에 한 번 나올만한 천하의 사고뭉치’였다. 그는 확실히 천재가 맞았다. 로이는 그림의 명성과 실력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흘 밤낮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림의 기행도, 최근에는 그나마 줄어든 모양새였다. 그 규모도 횟수도, 그림이 마탑에 들어와 수장 자리를 턱 떠맡은 초기에 비하면 확연히 작았다. 로이와 동료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제 우리도 걱정은 한 시름 덜을 수 있지 않겠느냐. 반응은 비슷했다. 그러나, 로이는 척추 중간쯤을 갉작거리는 기분을 채 씻어낼 수가 없었다. 분명 기쁜데, 기쁠 수 없었다. 축적된 통계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의 징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폭풍전야라 부르던가? 소용돌이의 낌새를 알아차린 것은 로이뿐이었다. 그러나 로이 마저도 알아차렸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림은 자주 수행원을 동행하지 않고 마탑을 나섰다. 어디 딸기 사탕이라도 숨겨둔 것인지, 언젠가부터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목적지로 향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기척도 자취도 모두 지우고 평생 도망자로 살 수도 있는 천재 마법사가 그림이다. 마탑에는 그림의 뒤를 쫓겠다 선언할 수 있을 정도로 간을 배 밖으로 빼놓고 사는 마법사는 없었으므로, 그의 외출은 항상 비밀에 부쳐졌다. 그저 문지기와 시종들이 가져오는 소식으로 ‘저주받은 백작 영애’와 관련이 있다더라 하는 단편적인 이야기만 주워들을 뿐. 로이는 가십을 듣자마자 백작 가로 찾아가봤어야 했다는 생각을 아주 나중에야 했다.
저주받은 백작 영애의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보았으나, 누구도 들어보지 못하였을 테다. 로이도 마찬가지였다. 마법과 저주는 한끝 차이라지만, 그림의 뒤를 쫓지도 못하는 간 작은 마법사들이 삿된 마법에 손을 대어보았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림이 누구인가.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마법사, 동시에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하의 사고뭉치. 기어코 ‘저주’에 파고든 그림의 불꽃은 끝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결국 마탑 가장 지하에 갇혀 있는 마도구를 부수는, 말 그대로 ‘기행’을 선보였다. 로이는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혼절할 것만 같았다. 사고를 덜 친다 안심하고 기뻐했던 나날들이 마탑의 벽돌들과 함께 산산히 부서졌다. 굳건했던 마탑의 지대가 들썩이는 모습을 로이는 머리털 나고 처음 보았다. 우스운 것은, 그 와중에도 그림은 멀쩡했다는 사실이다. 딱 저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의 배리어 안에서 그림은 히죽이며 웃고 있었다. 로이는 할 수 있다면, 자신이 일생 딱 한 번 자신의 최대치 마나를 돌릴 순간이 지금 찾아온다면, 저 이죽대는 얼굴을 한 대만 박아주고 싶었다.
날아가 버린 정신머리를 어떻게든 수습한 마법사들은 그제야 그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물론, 이전에는 혼이 나가버린 머리에 분노가 들이찼으니 이성적으로 시야를 정리할 수 없었다.- 자세히 보면, 그림의 작은 배리어 안에는 그보다 더 작은 체구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새초롬히 내려온 검은색 머리카락, 순수를 가득 담아 빚은 듯 동그란 눈동자. 한눈에 보기에도 사랑스러운 여성은 그림의 품 안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손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 순간, 모두의 머리에 한 문장이 스쳐 갔다. ‘저주받은 백작 영애.’ 그림이 지금까지 조용히 마탑을 나갔던 것도, 그림이 도달한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문지기와 시종이 짧은 이야기밖에 들려주지 못했던 것도, 저주와 연관 지으면 모두 해결되었다. 로이는 턱 아래에서 부글부글 끓던 분노가 사그라지는 감각을 생경이 느꼈다. 잠시나마 맛보았던 평화는 모두 저 백작 영애 덕이었다. 로이는 단번에 깨달았다. 아, 저분이 바로, ‘우리’의 아가씨다!
이후부터는 속전속결이었다. 마탑의 모두가 손을 걷어붙이고 그의 연애가 순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무래도 그림 자신은 아직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몇 년째 그를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림이 자신 이외의 인간에게 저만큼이나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을 그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이것은 분명 사랑이다! 마법사들은 열성적으로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만들어주겠다는 비장한 의지까지 느껴지는 태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그림의 ?타칭- 연애사에 가장 많이 개입한 것은 역시 그림의 비서인 로이였다. 그는 심지어 백작 가에 들러 영애와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애틋한 가족이었고, 사랑받아 마땅한 영애였다. 저주 때문에 잃어버린 딸을 되찾아 그들은 뛸 듯이 기뻐했으며, 그림에게 무엇이라도 사례를 하고 싶어했다. 대마법사에게 물질적인 것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모두 돌려보냈지만.
로이는 인간 대 인간의 마음으로 백작 영애의 행복을 빌었다. 하루가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저주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밤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몇 번의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였을까. 그래서였다. 로이가 아침부터 구겨진 그림의 곁에서 잠자코 서 있었던 것은. 그림이 보기 드물게도 늘어져 있는 이유는 백작 영애가 그의 곁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백작 영애가 나간 까닭은 로이가 그녀를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성인이 될 영애가 한 번도 파티를 즐겨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결코 그냥은 넘어갈 수 없었다. 아마, 그림은 넘어가기를 바랐던 것 같지만.
로이는 기다리다 못해, 결국 그림이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옆에 내려놓았다. 모두 그림이 오늘 끝내야 하는 것들뿐이었지만, 지금 강요하면 정말 마탑이 반파될 지도 모르므로 꾹 참았다. 가까이서 본 몰골은 더욱 가관이었다. 입술은 주욱 내밀어져 있고, 볼은 팔에 눌려 볼록하니 솟아올랐다. 대체 언제부터 저 모양인지 알 수 없어도, 마법사들이 그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로이는 안도했다. 지금의 그는 손짓 한 번으로 궁전을 뒤엎을 대마법사가 아니라, 영락없이 토라진 아이였다. 먹고 싶은 음식이, 좋아하는 장난감이 손에 들어오지 않아 삐쳐버린 꼬맹이였다. 로이는 눈썹을 삐끗 올렸다.

“그림 님. 이러지 말고 일어나 보세요, 예?”
“실타.”

입술까지 팔에 눌린 모양인지, 반쯤 샌 발음이 쉽사리 흘러나왔다. 로이는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꾹꾹 참아가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유우 영애 때문입니까? 그거라면 어제 이야기했다면서요.”
“그렁 거 아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대놓고 삐쳤구만! 슬슬 복창이 터질 것 같았지만, 로이는 이 역시 꾹꾹 참아가며 그의 상관을 보았다. 자신의 어깨에 마탑의 건물과 지대와 예산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는 주문처럼 ‘나는 어른이다’를 세 번 되뇌고는 다시금 정돈된 목소리를 내었다.

“영애께선 데뷔탕트에 가셨다고 하셨던가요?”

단번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로이는 서류 정리를 하는 듯,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번 연애 사건에도 조언이 필요할 듯싶었다. 아무튼 우리의 대마법사님은 온종일 마법만 할 줄 알고, 사고만 칠 줄 알지. 사랑과 연애에 있어선 정말 어린 아이가 따로 없다. 아예 맞은 편에 의자를 빼 앉았다. 결국 이 많은 서류는 제가 정리할 운명이었으니, 일찍이 앉는 것이 좋은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로이는 계속 앞에 보이는 그림을 힐끔대며, 서류를 차근차근 분류했다. 종이 뭉치가 그나마 책상에 고루 정리되어 높이가 낮아졌을 무렵, 풀 죽은 목소리가 슬며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림은 적어도 고개는 든 채였다.

“로이, 데뷔탕트가 뭐야?”
“설마 뭔지도 모르고 보내주셨어요?”
“그야, 유우가 가고 싶어하니까…….”

세상에. 이건 생각보다 중증일지도. 로이는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을 대신 깃펜을 힘주어 잡으며 참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대마법사님이 자신의 망토 속으로 껴안고 있을 때부터 알아보기야 했지만, 역시 백작 가의 영애는 보기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겠다. 아직 사랑을 자각하지도 못한 남자를 이토록 절절 매게 하다니. 소박하고 가녀린 소녀에게 무슨 힘이 있는 것인지. 대체 그림과는 어떻게 만난 관계인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지금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그림에게 묻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다. 언제 꽁지를 빼고 도망갈지 몰랐으니. 일단은 ‘고양이’ 아닌가.
로이는 매력 있는 백작 가 영애가 궁금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고마웠다. 그림의 사고를 줄여준 것뿐만 아니라, 그에게 다양한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인 듯하였기에. 마법은 타고나길 마나를 느끼고 다룰 수 있는 자들만이 배울 수 있는 학문이다. 그러니, 마법사들은 아카데미에 가기 전부터 자신의 마지막 길이 마탑임을 알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과 재능의 크기부터 다른 그림은 더했다. 아카데미를 들어가기도 전에 마탑에 스카우트되어, 그는 가장 꼭대기 층을 부여받고 청춘은 물론이거니와 평생을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림에게 세상이란 네모나게 정제된, 아주 작은 모형과도 같았다. 그는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았지만, 간혹 모두가 아는 것을 모르기도 하였다. 로이는 자신보다 어린아이로서, 그가 때로 안타까웠다. 마법사들은 스스로 창문을 열지 못한다. 합리와 이성 속에 갇혀 지혜로 자신을 점철하지만, 정작 용기는 부족했다. 그런 그림의 창문을 벌컥 열어준 사람이 백작 영애인 것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지도, 고운 분을 칠하고 오지 않았으나, 작고도 차분한 걸음으로 마탑 꼭대기에 도착해 문고리를 잡았다. 그림을 마주했다. 조곤조곤 속삭이는 노래는 마치 세상의 노래와도 같을 것이며, 꽃송이 하나 쥐여주는 날엔 바람을 가진 듯한 기분이 들 테다. 로이는 그것이 기꺼웠다. 사랑도, 연애도, 모두 서투르지만 이제 시작해 나가는 그림을 보는 것은 제법 즐거웠다.
로이는 보고 있던 서류를 옆에 밀어두고, 그림을 마주 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삐뚤빼뚤 불안한 태를 썼다.

“잘 들으세요. 데뷔탕트는 이제 성년이 되는 귀족들이 사교계에 데뷔하는 파티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볼 사이들끼리 첫 인사를 하는 거죠. 겸사겸사, 좋은 짝도 찾고요. 성년이면 이제 결혼을 앞둔 나이 아닙니까?”
“결혼? 하지만…….”
“예, 예. 압니다. 아마 영애께서는 그런 목적은 아니시겠죠.”

로이는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여기서는 한 번 찔러볼 필요가 있겠다. 불퉁하게 앉아 있는 그림은 지금 망설이는 것이었다. 자신을 두고 파티를 간 유우가 밉다가도, 데뷔탕트라는 말에 기뻐하던 유우의 얼굴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나 차마 거절할 수 없었을 테고, 그럼에도 곁에 없으니 불안하기야 하겠지. 로이는 언제 그가 유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좋을까 무던히 고민했다. 이번 기회로 알아서 깨닫는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만, 생각해보세요. 제일 예쁜 옷을 입고, 제일 멋진 액세서리를 했는데, 사람으로서 들뜨지 않겠습니까? 그때 마침 찾아온 멋진 영식이 춤이라도 신청하면, 혹시 모르는 거죠.”
“유우는 내가 필요해.”
“그게 남편으로서는 아니지 않습니까?”
“계속 옆에 있어야 한다니까.”
“저도 계속 그림 님 옆에 있는데요. 그럼 우리가 연인입니까?”
“토할 것 같은 소리 하지 마.”
“저도 싫습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상상만 해도, 아니, 상상하지 않아도 불쾌한 상황이다. 그림은 그보다 유우의 상상을 했다. 유우는 이름만 읊어도 금세 형상이 그려졌다. 검은 머리카락에 저보다 작고, 저보다 여리지만, 시선을 끄는 힘이 있는 사람. 그림은 수줍게 웃고 있는 유우의 위에 예쁜 드레스 한 벌을 올렸다. 푸른 드레스는 가슴 쪽에 풍성한 프릴이 달려 있고, 허리에서 천이 모였다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지는 모양이었다. 마치 푸른 불꽃을 형상화한 것 같아, 상상만으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고운 드레스를 입은 유우는 유난히 빛났다. 머리를 반쯤 틀어 올려 꽃 모양 머리핀으로 고정하니, 백작 가 영애의 태가 금세 났다. 그녀는 허리를 편 채 홀의 중앙으로 걸어왔다. 샹들리에의 빛이 곳곳에 달린 장식에 와 부서졌다. 반짝이는 빛들 사이에서, 그림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역시 유우였다. 어느새 상상 속에는 자신도 있었다. 유우의 미소를 받으며, 남색 턱시도를 빼입고 머리를 반쯤 위로 올린 제가 그려졌다. 그림은 짐짓 점잖은 척, 뒷짐을 졌으나 등 뒤에선 꼬리가 양옆으로 살랑였다.
유우는 천천히 그림에게로 걸어왔다. 많은 이들의 시선을, 그리고 이야기를 지나쳐 오롯이 그림에게로 향했다. 또각대는 구둣소리는 경쾌하고 가벼웠다. 발끝이 마주치기 한 걸음 정도 남았을까. 그림은 조심스레 유우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하얀 연미복 장갑이 근사한 모양으로 자태를 보였다. 그러자, 유우의 얼굴에는 환히 미소가 올랐다. 그림은 언젠가 그녀의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를 보고 싶다 생각해왔다. 아마도, 저것이 항상 바라왔던 모습일 테다.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볼 위로 발그레 홍조가 올랐다. 얇은 손이 천천히 올라온다.
그러나, 손끝이 내려앉은 곳은 하얀 장갑 위가 아니었다. 유우는 검은 장갑의 알 수 없는 사내에게 손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곧, 사내가 이끄는대로 걸음을 옮겨 홀의 어딘가를 차지했다. 그림은 빈손과 사라져버린 유우의 자리를 허망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검정색 꼬리가 빳빳하게 솟아 천장을 향했다. 이럴 수는 없어, 절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게다가 영애께서는 이번이 첫 파티시잖습니까?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로이는 그대로 이어가던 말을 멈추어야 했다. 그림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림 님?”
“안 되겠어, 로이. 나, 다녀와야겠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린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는 이제 확연히 불꽃이 붙은 모양이었다. 로이는 보이지 않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꽉 막힌 대마법사님이 움직일 생각인가 보다. 이대로 연애가 탄탄대로로 흘러간다면, 저도 이제 비서 자리는 그만두고 작은 연구실을 얻어 행복한 마탑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테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의상을 구해올 테니,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시간도 늦었겠다 그냥 다녀올게! 아, 누가 나 부르면 없다고 하고. 알지?”
“예?”

지금 그 모습으로 가신다고요? 그 눌린 얼굴과 고깃고깃한 망토로요? 로이는 반드시 해야 할 말을 혀 위에 올려두고 있었으나, 그것이 제대로 세상의 바깥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말을 뱉기도 전에 맞은편의 사람이 홀연이 사라진 탓이다. 높은 서클의 공간 이동은 고요했다. 시전음도 없이 사라져버린 탓에 로이는 비어버린 공간에 잔존하는 바람만 잡아챌 뿐이었다. 괜찮을까? 자연스레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그보다는 지금의 자신이 제일 걱정이었다. 빈틈없이 쌓인 서류는 그림과 함께 공간 이동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숨과 함께 재차 자리에 앉았다. 로이는 그림을 마음으로 응원하기로 했다. 반드시 영애와 행복해져서, 제 행복도 좀 주시기를!


* * *


붉은 벨벳을 옆으로 거두고 드러난 인영은 푸른 드레스의 소녀였다. 바깥은 차갑다고는 할 수 없는, 이제 막 여름을 넘어가는 날씨였으나, 해가 져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에게 있어 숨통을 트이게 하는 한 줄기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건물 안은 무척이나 더웠다. 밝은 조명이 이리저리 설치된 탓도 있겠으나, 모인 이들의 기세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이러한 파티가 처음이라 그런 것일까, 유우는 차마 들뜬 분위기를 탈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대화보다는 독서가, 경쟁보다는 공존이 좋았으니. 얕은 술과 파티장 내의 공기에 취해 멋대로 들뜬 사람들은 유우와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만 같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저주받은 영애’로 통하였으니, 유우에게로 향하는 시선은 많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주지 못하였다는 것이 옳으리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었으니. 차라리 사라져버렸으면 바라게 된 것은 또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데뷔탕트란 한쪽에서 응하지 않아도 홀로 끌어오는 자리다. 시선으로 그치지 않고 손을 뻗어오는 이들이 꼭 있었다. 유우는 그들의 기세에 몰려 점점 뒤로 물러나더니, 결국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뒤에는 대리석 벽의 차가운 감촉이 가로막고, 앞에선 한없이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삼키려 군다. 유우는 테라스로 도망쳐버리는 것밖에 수가 없었다. 물론, 어색한 미소를 잊지 않고.
그나마 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살 만했다. 밤하늘은 드높았고 구름도 없는지 빼곡히 들어찬 별들이 잘 보였다. 유우는 도망치듯 달려오느라 구겨진 옷을 신경 쓸 틈도 없이, 매혹적인 하늘에 마음을 내어주었다. 프릴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등 뒤에 자리한 리본은 거의 풀리기 직전이었으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홀 안의 번쩍이는 조명과 각종 디저트보다 눈앞에 펼쳐지는 새카만 밤하늘과 지저귀는 풀벌레 소리가 아름다웠다. 졸졸대는 분수의 물소리가 만드는 박자에 맞추어 바람이 풀 스치는 소리가 이따금 이어졌다. 한데 어우러져 들리는 음악은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유우는 어깨가 다 펴질 때까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쩐지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하늘 위로 손을 뻗어 올렸다. 별을 잡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순간, 시야가 완전히 바뀌었다. 밤하늘과 같은 흑색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눈 앞에서 보란 듯이 넘실댔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찾았다.”
“그림?”

소리도 전조도 없이 등장한 소년은 유우의 앞에서 빙긋 미소 지었다. 소녀를 본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되게, 유우는 당황스러운 낯을 숨기지 못하였다. 벙긋대는 입은 분명 무엇인가를 말해야 함을 알고 있는 듯 보였으나, 채 성음을 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뻗었던 손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그림이 먼저였다. 그는 대뜸 그녀의 손을 아래에서 붙잡아 그러쥐었다. 그제야 유우는 그림이 공중에 떠 있음을 실감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시끄러운 곳은 싫다면서.”
“마음이 바뀌었어.”

대마법사의 변덕스러운 성정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 유우는 그저 고개를 주억일 뿐, 더 토를 달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구해주는 일도 아주 짧은 변덕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유우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유우, 너랑 춤을 추고 싶어져서.”

그림은 그대로, 잡고 있던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큰 힘을 쓴 것도 아니건만, 유우는 자신의 몸이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가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심지어, 발밑이 붕 뜨고 있었다. 힘만을 사용하였다면, 몸 자체가 위에 있는 그에게로 끌려가지는 않았으리라. 휑해진 발밑을 바라보던 유우는 고개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끌어 올려진 발은 어느새 테라스의 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기껏해야 3층 높이였지만, 생각보다 바닥의 시야는 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림은 이를 알아채었는지, 금세 다른 손을 끌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두도록 이끌었다. 남은 손은 유우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체온이 몸을 감싸자, 그나마 유우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른 놈들이랑도 춤, 췄어?”

거리가 좁아지니 목소리는 귓전에서 바로 울렸다. 유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왜?” 하고, 낮은 목소리는 변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러나, 고개를 뒤로 물리는 것도, 발을 뒤로 빼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바람을 타고 있는지, 몸은 점점 위로 부유했다. 어디까지 올라갈지 알 수 없는 판국에 유우는 그림을 꼭 붙들고 있어야만 했다.

“무서워서.”
“무서워?”
“응, 사람을 마주 보는 게.”

춤을 춘다는 행동 자체보다는, 그들의 눈동자가 두려웠다. 가십 위에 올라 재단된 것이 십수 년이다. 혜성처럼 갑작스레 기억 속에 등장한 영애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유우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눈을 감기를 택하였으며, 도망하기로 결정하였다. 달음박질의 끝은 그림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그는 시작의 공간이자, 불안이 가장 적은 곳이었으므로.
유우에게 세상이란 잘 쓰여진 동화책에 불과했다. 자신이 살 수 없는 곳, 그저 픽션으로 가득 찬 곳. 그 책을 열어준 것이 그림이라는 자였다. 혼자서는 열지 못하는 표지를 떡하고 열어, 그림은 기어코 유우조차 하나의 인물로 만들어주었다. 그것이 한없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상황에도, 그를 붙잡고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럼 나는? 지금도 이렇게 보고 있잖아.”
“그림은 괜찮아.”

그제야 유우는 고개를 떼어내어 제 앞에 자리한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끝도 없이 떠오를 것 같았으나, 어느새 부유하던 몸도 멈추었다. 둥근 눈동자에 상이 정확히 맺혔다. 쫑긋대는 귀도, 바람에 스쳐 흩날리는 흑색 머리카락도, 눈을 감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편안했다. 유우는 두 눈을 곱게 휘었다.

“그림 님은 그림 님이니까.”

그러자, 옮기라도 한 듯, 마주하고 있던 그림의 얼굴에도 미소가 만연했다. 끌어당긴 입꼬리는 자연스러웠으며 휘어낸 눈매가 시원한 곡선을 그렸다. 그림은 진짜 행복할 때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하늘대는 웃음소리는 상공에서 번졌다.
하얀 달을 조명 삼아, 작아진 세상을 바닥 삼아, 자연의 소리를 노래 삼아, 두 사람은 춤을 추었다. 검은 구두 물러날 듯싶으면 어느새 하얀 구두가 이를 따랐고, 잠시 벌어졌던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손이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공중을 밟아가며 빙글빙글 계속해 돌았다. 구겨진 푸른 드레스 자락이 느리게 휘날렸다. 끝이 접힌 남색 망토도 부드러이 바람을 탔다. 어떠한 모양이든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있어 그저 그들이었으므로.

작은 소년의 창문이 열리고,
사라진 소녀의 책장이 열리면,
이야기는 이어진다. 아마,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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