燈下不明 : 등잔 밑이 어둡다

야우님 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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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는 심각했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자기 생각에 빠져 골몰하다가 다음 수업에 지각을 할 정도였다. 성실한 유우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선생님이 도착하시기 전에 교실로 되돌아왔고, 문제없이 수업을 들었다. 그래도 자꾸만 정신이 다른 곳으로 갈 것만 같아서, 유우는 자꾸 핀트가 엇나가려는 자신을 다잡고 집중해 필기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수업 시간에 늘어져서 졸고 있는 그림 때문이었다. 아예 엎드린 채로 잠에 들어있는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데도 신경이 쓰였다.

"옆에 자는 학생이 있다면 깨우도록."

선생의 지적에 유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꼭, 자신을 그림과 붙여놓는 건지. 물론 자신은 마법을 쓸 줄 모르는 평범한 인간에 감독생으로서의 역할이 있고, 쟤는 감독이 필요한 마수니까. 이유야 알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에는 조금 억울해지는 것이다. 꼭 모두가 유우와 그림을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했다. 그러니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요즘 너무 혼란스러운데.
유우는 결국 그림을 툭툭 쳤다. 그림은 아무것도 모르고 함냐, 하품만 하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림, 수업 중이니까 일어나야지…."

유우의 노력에도 일어나지 않자, 선생님도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림은 잠꼬대로도 '이 몸은… 위대해!'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유우는 행여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라도 될까봐 입을 꾹 틀어막아버렸다. 그림이 새근새근 내뱉는 숨이 손끝에 닿아왔다. 뜨거웠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온기가 느껴진다.
유우는 뒤늦게 자기가 입술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화다닥 몸을 떨어트렸다. 몰라, 이상해... 얼마 전까진 그냥 귀여운 고양이였는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우는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치자 마자 서둘러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림은 내버려 둔 채였다. 역시나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림을 보면 이렇게 당황스러운지, 얼굴은 터질 듯 새빨갛게 변하는지, 심장은 쿵쿵 뛰는지, 자꾸 시선 안에 그림을 두게 되는지. 자꾸만 슬퍼지고 기쁘고 화가 났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감정이 이리저리 널을 뛰었다. 보고 싶고 그리우면서,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상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멀어지는 것은 그뿐, 결국 자의든 타의든 그림의 곁으로 되돌아오게 됐다. 모두가 그녀에게 그림의 행방을 물었고, 심지어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잊어가는 사람들마저도 자연스럽게 그림 옆에 있었던 희미한 그 애로 떠올렸다. 심지어 낡은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기까지. 비교적 좁아진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을 잘 때, 너는 무슨 꿈을 꿀까 자꾸만 궁금해졌다.

학교 정원을 걸으며 내내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혼자서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당면한 것 같았다. 지금껏 이 뒤틀린 세계에 덩그러니 떨어졌어도 괜찮았다. 마력이 없어 마법을 쓸 순 없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 세상에 적응할 방법도 찾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이란 것은 알 수가 없었다. 바깥의 무언가는 내가 모르는 세계라고 여기고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데. 내 마음은 내 것이면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누구한테 고민 상담이라도 해야 할까.

유우는 작게 끙, 하고 앓았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명확히 정의라도 내려지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에이스한테 물어볼까,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그 애는 듣자마자 '네 마음인데 너가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하고 놀릴 것 같았다. 듀스나 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듀스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보겠다며 머리를 쥐어 싸맬 것 같고, 트레이 선배는 그냥 웃고 넘겨버릴 것 같았다. 아즐 선배는, 음. 고민 상담을 하고 싶다고 말을 하는 순간 붙들려 계약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정신 차리고 보면 다리라도 내어줘야 할지도 몰라, 안 돼. 유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곧 비행술 수업이었다. 쉬는 시간이 벌써 절반 쯤 지났으니 슬슬 운동장으로 향해야 할지도 몰랐다. 유우는 머리를 싸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햇빛도 너무 거셌다. 이대로 걸어 다니다간 타들어 갈지도 몰라. 이 세계에서도 가을의 햇빛은 강렬하고 뜨거웠다. 그늘로 찾아가야겠다. 아직도 그림과 제대로 마주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다렸다가 최대한 늦게 그림을 보고 싶었다. 무작정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 멀리에 가장 큰 나무를 발견했다. 저기에 있으면 좀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히 오늘은 나무 근처엔 사람이 없는 듯했다. 언제나 학생들이 쉬느라 번화한 곳이었는데 운이 좋네. 유우는 땅에서 솟아오른 뿌리 둥치 위에 걸쳐 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앉아 매끈해진 자리였다.

"아, 어떻게 하지…"

유우가 턱을 괸 채로 중얼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다람쥐라도 지나가는 소리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소리가 자꾸 커지더니, 무언가 휙 뒤집어지는 듯한 인기척이 들렸다. 유우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정확히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나뭇가지에 무릎 아래를 걸친 채로 빨래처럼 거꾸로 매달려있는 릴리아가 있었다. 유우는 눈을 깜박거렸다. 조금 놀랍긴 했지만, 그렇다고 예상 바깥의 사람은 아니었다. 종종 이렇게 나무 주변에서 쉬는 그를 본 적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발랄한 소년의 외관에 맞게 장난스럽게 굴다가도 어딘가 온화하고 중후한 느낌을 주는 그이기에, 유우도 예의에 맞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무덤덤한 반응이 좀 싱거웠는지, 릴리아는 혀를 짧게 차며 나무에서 가벼운 몸짓으로 내려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재미가 없구먼."

안정적인 몸놀림이었다. 그녀의 앞에 능숙하게 착지한 그는 모든 게 유려하고 우아해 보였다. 뭐랄까, 숲 속에서 아주 오래 산 현자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유우는 그제야 생각했다. 왜 릴리아 선배에게 물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모든 것에 해박해 보이는 릴리아라면, 뭔가 심상찮은 답을 내어줄지도 몰랐다. 내 이야기가 아닌 척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선배님."

툭툭 발을 털고 떠나려는 릴리아를 서둘러 뒤에서 불렀다. 릴리아는 몇 걸음을 내딛다 그녀를 뒤돌아봤다. 유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 슬쩍 입을 뗐다.

"혹시 고민 상담해주실 수 있나요…?"

릴리아는 고개를 기웃거리다 천진하게 웃었다.

"자네가 고민 상담이라니 별일이구만. 고민이라는 게 뭔가?"

그가 돌아와 자연스럽게 유우의 옆에 앉았다. 유우는 잠시 일으켰던 몸을 다시 내렸다. 어떻게 말문을 떼야할지 도통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한참 입술만 달싹였다. 자기 손을 꾹 맞잡은 유우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될 대로 되라지.

"제 친구 이야긴데요…"
"그래."
"어, 음…"

유우는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의 상황을 남의 이야기인 마냥 더듬더듬 내뱉었다.

"원래, 그냥, 친구로 지내던 사이가 있었데요. 제 친구랑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 사람이 좀…아니 많이 바뀌었다고 했어요. 그 뒤로 왠지 어색하고 이상하데요."
"어떻게 어색하고 이상하다고 하던가."
"그냥, 눈이 마주치면 당황스럽데요. 이상하게 막 심장이 뛰고, 옆에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그런데 떨어지면 보고 싶고, 그 사람이 궁금하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되게 얄미운데 한편으론 사랑스럽기도 하고. 감정이 막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한대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이 엎치락 뒤치락이라 이상해요."

종내 자기 이야기처럼 말하고 말았다는 것을 유우는 깨닫지 못했다. 릴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으니까. 말이 끝나고 나서도 턱을 괴고 한참 고민을 하던 그는, 이내 뭔가 답을 찾았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의사의 진단을 기다리는 것처럼 긴장이 됐다. 유우는 땀이 찬 손을 슬쩍 옷에 문질러 닦아내곤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내,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네."
"앗, 정말요?"
"그래.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지."

어쩐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확 밀려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뢰가 느껴졌다. 역시 릴리아 선배, 대단한 사람이었어. 유우는 그의 뒷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고생이 참 많았겠구먼. 젊은이가 그 감정을 깨닫기엔, 꽤나 힘들었을 텐데. 하지만 안심하게나. 들으면 바로 납득할 수 있게 될 테니. 그건 바로…"
"그건…!"
"모성애일세."
"모,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모성애라니 내가? 그림을 상대로 모성애를 느끼고 있다고? 뭔가 고장 난 것 같은 유우를 아랑곳하지 않고, 릴리아는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나도 누군가를 지켜본 적 있다네. 아주 어릴 때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 훌쩍 자라고 나더니 어색하고 이상했지. 그 애가 속을 썩이면 밉고 싫다가도, 그 애가 하는 말 한 마디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네. 나도 그제야 알겠더군. 지금 느끼는 감정이,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부성애'라는 사실을 말일세."
"아…?"

어쩐지 조금 납득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너무 논리 정연했다. 생각해보니 비슷한가. 하긴, 그 전의 고양이 모습이던 그림은 사고칠 땐 밉상이더라도 어느샌가 마냥 사랑스럽게 귀엽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그 애가 갑자기 사람이 되고 나서 어색해졌고, 좀 더 챙겨줘야 할 것 같고, 보듬어 줘야 할 것 같았는데… 자꾸 보고 싶고 그리웠던 이 기분은, 그러니까.…

"모성애군요."
"그래 모성애일세."

유우가 납득한 것 같자 릴리아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우는 여전히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그 친구에게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마음껏 사랑을 베풀라고 조언해주게나."

종이 울렸다. 다음 수업이 곧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다정한 답변을 듣고도 아직 멍한 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릴리아는 하늘하늘한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남은 것은 유우뿐이었다. 한참 자신의 감정과 모성애를 대입해 보던 유우는 결국 결론 내렸다. 나는 어쩌면, 그림에게 모성애를 느끼고 있는 걸지도. 그게 정말 맞는 것 같아.

"진짜 모성애였잖아…?"

유우는 약간 허탈한 듯이 중얼거렸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비행술 수업은 근처 운동장에서 이뤄졌다. 다행히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길로 향하는 내내 유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자꾸 그림이 반짝반짝 보였던 것도,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던 것도, 어딘가 맞부딪힐 때마다 화상을 입을 것 같다고 느끼는 것도, 모두 마음이 이어져 있는 모성애를 느꼈기 때문이구나. 나는 이 아이를 애틋하게 사랑하나 봐. 그림이 훌륭한 대마법사가 되도록 응원하고 잘 키워야겠다. 혼자 앓기보다 상담해보길 정말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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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시작됐다. 마력이 없는 유우는 빗자루가 어떤 원리로 나는지 연구했을 뿐이지만, 그림은 빗자루에 마력을 불어넣어 그 위로 올라탔다. 하지만 녀석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집이 있는 빗자루라, 그림은 빗자루와 언성을 높이며 몸싸움을 해댔다. 다른 녀석들이 다 날아가거나 가볍게 활공하고 있는 중에도 그랬다. 확 손톱으로 긁어서 쓰러트려 버릴 수도 없고! 그림은 짜증을 내며 한참 씨름을 하다가 결국 빗자루와 잠시간의 휴전을 선택하고 그대로 운동장에 드러누웠다. 새파란 잔디가 푹신한 이불처럼 등 뒤에 깔려 있었다. 아, 덥다. 그림은 윗옷 자락을 팔락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인간이라 털이 없어서 조금 덜 더운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가 자박자박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푸른 불꽃과 귀가 일렁거리며 쫑긋쫑긋 움직였다. 이 소리는, 익숙했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다가오는 향기로운 냄새도 유우다. 그림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어쩐지 자꾸 나를 피해 다녀서 도통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웬일로 유우가 먼저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림은 누운 채로 꼬리 끝만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림!"

유우의 부름에 그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나른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 마수일 때의 습성이 남아있었다. 어쩐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의 유우가 퍽 귀여워 보였다. 내내 침울하고 고민이 많아 보였는데. 뭔가 해결된 건가? 그림은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림, 그림."
"응, 유우."
"빗자루는 어때? 잘 탔어?"

그런데 어째 말투가 좀 이상하다. 그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전까진 묘하게 수줍고 부끄러워하는 소녀 같았는데. 어쩐지 눈빛에 열기가 사라지고 포근함만 가득 감돌았다. 이건 마치, 어린 고양이들이 어미와 함께 놀 때 느끼는 감정 같았다. 추측건대 그 아이들이 어미를 꾹꾹이를 하며 느끼는 감정 비슷한 것이리라. 그런데 왜 이런 것이 느껴지지? 그림은 조금 당황하고 어리둥절했다. 빗자루는 바닥에 툭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어, 이 몸이… 아니,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아구, 빗자루가 그랬어? 내가 혼내줄까, 그림?"
"엥? 뭐라고, 유우?"
"내가 말 잘 들으라고 한 마디 해줄게. 우리 그림 빗자루 타는 거 좋아하잖아."

유우의 발언에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고 유우를 쳐다보던 그림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자꾸 멀어지려고 하던 유우도 신경 쓰였지만, 지금의 유우는, 정말로… 이상했다. 엄청나게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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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유우는 계속, 엄청나게, 진짜로, 정말로, 이상했다. 그래도 그 전까진 마수와 인간이었어도 동등한 존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뭔가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유우와 있는 시간들은 언제나 매끄럽게 즐거웠다. 그런데 인간이 되고 나서 그 연금술 사고 이후로, 모든 게 이상했다. 이 몸은 언제나 변함 없었는데.

예를 들면 계속 이런 식이었다.

도시락을 싸줄 때도 평소라면 참치 샌드위치만 깔끔하게 싸서 나눠 먹었을 텐데, 어쩐지 유우는 잔뜩 장을 봐서 번잡스럽게 부엌에서 뚝딱거렸다. 그러더니 갖은 음식들을 고루고루 해놨는데 모양새도 영 엉성하고 이상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억지로 꾸며낸 음식 같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평소와 달리 맛도 없었다. 딱 몸에 좋을 것 같은 맛이 느껴진다. 그림은 도시락에 든 이상한 음식들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옆에 유우가 있어서 차마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왜 그래, 그림?"
"… 입맛이 없어."

어물쩡 대답한 그림은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하지만 유우가 그걸 두고 보지 않았다. 씁, 하고 혀를 찬 그녀는 다시 도시락 뚜껑을 강제로 열었다. 그림의 꼬리가 불만스럽게 의자를 툭툭 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른 먹어."
"안 먹고 싶어. 참치도 아니고...평소에 먹던 게 좋은데."
"편식하지 않고 먹어야 튼튼하게 자라지."

아무리 항의를 해도 유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게 싫었다. 자꾸 아이 취급하는 것도 싫었다. 뭐에 단단히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유우는 '내가 뭐?'라는 반응일 것 같았다. 괜히 타박하기도 싫었다. 불퉁해선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그림에게로 유우는 손을 내밀었다. 방울토마토였다. 도시락 안 샐러드 가운데에 놓여있던 빨갛고 둥그런 과실. 입가에 방울토마토를 툭 댄 유우는 다시 그를 얼렀다.

"이거라도 먹어, 배고프잖아 이따가."

안 먹으면 분명히 꼬르륵 소리 날텐데? 덧붙이는 말에 그림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먹고 싶은 건 따로 있었는데. 그림은 아예 입을 크게 벌려 와앙 하고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물론, 유우의 손끝까지도. 유우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림이 한 템포 더 빨랐다. 손가락 사이를 까끌한 혀로 쓱 쓸어내곤 느른하게 할짝였다. 잔뜩 간지러우라지. 그녀는 크게 흠칫거리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새파랗게 변했다. 유우는 후다닥 손가락을 빼냈다.

"너, 너…"
"응?"
"이, 이러면 안 돼!"

크게 소리를 친 유우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도망갔다. 그림은 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절대 안 되는 금기라도 건드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평소엔 음식 주다가 손가락 핥으면 간지럽다며 웃었었는데. 왜 저렇게 싫어하는 거지. 나는 여전히 그림인데.

그리고 다른 날은 또 이랬다. 그림이 실수로 얼음 마법을 잘못 써버려 자기 자신을 꽁꽁 얼려버렸을 때, 홀로 내내 추위에 떨던 그림은 결국 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수업이며 뭐며 모두 병결 처리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아픈 건 또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마수일 때도 감기에 걸리면 휘청휘청하긴 했어도, 그때에 비하면 이 몸은 제어가 훨씬 잘 되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으니까.

결국 감독생인 유우의 간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우는 걱정 어린 눈으로 그림의 이마 위에 얼음주머니를 만드느라 차가워진 자신의 손을 얹었다. 감기로 인해서 그림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림은 내내 추위에 떨면서도 이마에 올려진 시원한 느낌이 좋아서 작게 앓았다. 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활달하게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곧이라도 꺼질 듯 사그라들어 있는게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싶어서 유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우."

멍한 와중에도 유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림은 자꾸 그녀를 부르다, 힘이 없는 손을 뻗어 유우의 고개를 잡아 들어올렸다. 막 굴러 떨어지기 직전의 눈물이 눈가에 애처롭게 맺혀있었다. 손끝으로 눈가를 닦아주자 눈물이 묻어나왔다. 그림의 꼬리 끝이 조용히 까딱거렸다.

"…나 안 울어."
"퍽이나…난 괜찮아, 유우."

유우는 입을 달싹이다 결국 꾹 다물었다. 그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도 유우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자신을 향한 다정과 애정이 녹아있지만, 여전히 방향이 완전히 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림은 끙, 앓으며 몸을 뒤챘다.

"우리 그림, 어디 불편해?"
"응."
"어디가?"
"네가 '우리' 그림, 이라고 하는 거."

뜻밖의 말이었는지 그녀가 멈칫하고 굳었다. 그림은 천천히 눈을 감고 겨우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뗐다. 작게 기침이 나왔지만 겨우 숨을 골랐다.

"나는 네 아이가 아니라구."

그림은 겨우 그 소리를 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유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안아줘, 유우."
"……."
"네가 안아주면 좀 나아질 것 같아."

유우는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하지만 대장의 명령에 따르라는 그의 말에 이겨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림의 팔 한쪽을 베고 누워서 품에 꼭 끌어안겼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은 유우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정말로, 감기가 좀 낫는 것 같았다. 맞닿은 몸의 모든 자리가 몽글몽글하니 떨리고 설렜다. 터질 것 같은 감정과 마음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달이 저 머리 꼭대기 위로 떴을 때쯤엔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열이 다 식어있었다. 몸이 뻐근하지만 개운했다. 조금만 있으면 곧장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림은 자신의 품 안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었다. 그림은 물끄러미 그 애의 얼굴을 바라봤다. 선이 얇고 부드러운 뺨. 긴 속눈썹을 드리우고 밤하늘 같은 눈동자를 감춘 눈꺼풀. 밤바다의 물결처럼 하늘하늘 흩날리는 긴 머리칼. 언제나 봐도 사랑스러운 나의….

"… 바보 아니야?"

그림은 그녀 몰래 중얼거렸다. 그는 팔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짝 안았다. 자는 사이에 약간 벌어졌던 두 사람의 틈이 사라졌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렇게 좋은데 보고 있기만 해도 좋고, 안고 있으면 더 좋고, 곁에 있으면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나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게 뭔지 나는 잘 알 것 같은데. 인간들이 말하던 사랑이잖아. 나도 널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근데 자꾸 너는 너를 피하고, 나도 피하고, 자꾸만 모든 걸 부정해버리니까. 나는 자꾸 화가 나. 억울해진단 말이야. 왜 자꾸 도망치지?

"좋아해."

듣지 못할 고백이었다. 아마 귀로 듣는다 해도 못 들은 척 멀리 도망가버릴 것이다. 하지만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명확히 단어로 말하고 나자 마음이 더 또렷해졌다. 그림은 잠든 유우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몇 번이고 속삭였다. 좋아해, 유우 좋아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행복했다. 그림은 그녀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곤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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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평범한 나날이었다. 그림은 천방지축으로 학교를 헤집고 다녔고, 유우는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뒤처리를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림은 잔뜩 사고를 치고 다녔다. 유우의 신경을 빼앗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유우는 부글거리다 못해 터지기 직전인 마음을 꾹꾹 눌러담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림!"

또 그림이 잔뜩 사고를 치고 말았다는 이야기에 유우는 결국 후다닥 도서관으로 달려왔다. 도서관 책을 마구 엎어버릴 정도로 빗자루를 타고 안을 휘젓다 창문을 막 열어젖히려던 그림은 도서관 천장에 거의 붙은 채였다.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림은 누가 봐도 사춘기 소년이 따로 없었다.

"얼른 내려와!"
"왜!"
"혼나!"
"감히 누가 이 몸을 혼을 내!"
"내가!"

유우는 화가 나서 펄쩍거리며 손짓을 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그림이 도통 잡히질 않았다. 그림은 아예 빗자루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듣지도 않는 모양새였다. 유우는 이럴 때는 정말 속이 상했다. 자기도 마법을 써서 그림을 확 잡아버리고 싶은데, 대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땐 마법을 못 쓴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심지어 자꾸 어긋나 버리는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안했다. 혹시라도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러다가 또 다시 겉잡을 수 없게 된다면, 이번에도 눈 앞에서 아무 것도 못 한 채로…심장이 철렁했다. 모성애가 원래 이렇게 커다란 감정일까?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웠다.

"유우, 그림! 너네 … 도서관 다 정리하고 와!"

분노한 사서 선생님이 왁 소리를 지르곤 다른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버렸다. 난리를 치는 그림 때문에 혹시라도 불이라도 붙으면 큰일이었다. 결국 넓디넓은 도서관에 오로지 단둘만 남았다. 그림은 그제야 빗자루를 낙엽처럼 좌우로 살랑살랑 움직이며 아래로 내려왔다. 여전히 빗자루 위에 걸쳐 앉은 채였다.

"이 몸을 혼내?"
"당연하지. 말 안 듣는 아이는…."
"난 아이가 아냐."

그림은 하악질을 하듯 귀와 꼬리털을 삐죽 세우고 낮게 속삭였다. 어느새 가까이 온 그는 그녀와 얼굴을 바짝 맞붙였다. 유우는 저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섰다. 하지만 아예 도망갈 수는 없었다. 멀어지는 만큼 그림이 훌쩍 다가왔기 때문에.

"전에도 말했지, 유우. 나는 네 아이가 아냐."
"……"
"그래도 계속 아이 취급을 해서, 화가 나. 못 참겠어."

그림은 불퉁한 낯으로 유우를 쳐다봤다. 어쩐지 그의 날 선 눈빛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유우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차, 왜지? 유우는 감정의 진폭이 커지는 것을 알아차리곤 당혹에 젖어들었다. 예상 범위 밖이었다. 그림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더 이상 그도 참을 수가 없었다. 멋대로 난장을 피우면서 이 짜증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따라와서 화를 내는 유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좋아하니까 보고 싶었다. 옆에 오는 네가 언제나 좋았다.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나는 널 엄마로 취급할 생각이 없어."
"……!"
"난 널 좋아해, 유우."

그림이, 나를.
그 말을 들은 순간 언젠가 들었던 미친듯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다시 마음 속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유우는 직감했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벽이 부서져버렸다고. 그리고 그 사이 숨어있던 마음이 흘러나와 귓가에 정확히 속삭였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벼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