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몽치(@mongchi_cmcm)님 타로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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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당혹스럽고 잔인한, "처음 뵙겠습니다."

세계에서 오로지 그림만을 잊은 유우×그런 유우의 소식을 접한 그림

유우는 의무실에서 눈을 뜹니다. 분명 안뜰을 지나가다 매지컬 디스크가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장면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후는 거짓말처럼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러나 어쩐지 목 뒤가 뻐근한 것이, 대충 상황이 짐작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교내에서 위험하게 매지컬 디스크를 날리느냐고 투덜대며 몸을 일으키던 유우는, 자신의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 학생을 발견합니다.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것을 보면, 사바나클로의 학생인 것 같아 보입니다. 설마 이 학생이 자신에게 매지컬 디스크를 날려서 사과하러 왔나… 유우는 몽롱한 머리를 필사 적으로 돌려봅니다.
 
그림은 매지컬디스크를 맞고 쓰러진 유우를 의무실까지 업어 왔어요. 함께 와 준 에이스와 듀스가 무사할 것이라고 위로해도,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야, 최근에 유우는 그다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걸요.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진 탓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그 가을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탓인지… 근래의 유우는 그림의 부름에도 반응이 늦었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고 합니다. 비교적 유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적은 에이스와 듀스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지만요. 결국 그림은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유우가 깨어날 때 까지 곁을 지켰다고 해요.
 
유우는 고민하다가 미지의 인물을 살짝 흔들어 깨웁니다. 자신과 인연이 없는 사바나클로의 학생이 왜 자신의 침대에 기대어 자고 있는지는 몰라도, 유우의 짐작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은 분명히 수업 시간일 것이 분명하니까요. 더불어 자신이 어떻게 의무실까지 왔는지, 디스크를 날린 학생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나 유우가 마주한 것은, 혼란에 빠져 격정적으로 일렁이는 푸른 눈과 물기에 촉촉이 젖어 들어간 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였어요. 유우는 당황합니다. 갑자기 왜 우는 거야? 아니, 애초에, 이 사람은 어떻게 나를 알고 있지? 분명 유우는 오늘, 이 푸른 눈의 고양이 수인 학생을 처음 보는 데 말이에요.
 
그림은 그다지 머리가 좋다고 할 순 없지만, 마수답게 직감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평소에는 이 능력이 유우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의 직감이 틀렸기를 바라요. 자신을 흔들어 깨운 유우와 눈을 마주쳤는데도, 유우는 그 흑요석 같이 빛나는 눈에 자신을 비추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평소처럼 ‘그림.’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지 않으니까요. 제아무리 그림이라도 이건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유우… 아무리 그림이 유우를 애처롭게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없어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양호 선생님이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해 줍니다. 일시적인 기억 상실이며, 매지컬 디스크에 의해 유우에게 스며든 마력이 자연적으로 증발한다면 아무 탈 없이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고요. 본래 마력 없는 일반인이 갑작스럽게 마력을 받아들이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유우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가슴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울렁이며 유우의 차분한 사고를 방해해요. 뒤에서 ‘그림’이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유우의 사고를 더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림은 유우가 아무 탈 없이 돌아올 수 있다는 소식에 안도합니다. 그리곤 스스로 파이팅을 외치며 유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요. 평소에는 유우가 그림을 ‘감독’했다면, 유우의 기억이 돌아올 때 까지는 그림이 유우를 ‘감독’하면 되는 것입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원래부터 두 사람은 한 학생이었고, 늘 함께였으니까요. 물론 유우와 함께 있어도 어쩐지 외로운 느낌이 들곤 합니다. 두 사람의 추억을 앗아간다는 것은 이런 기분일까, 싶어 조금 쓰게 미소지어요. 그런 그림의 기분을 알았는지, 유우 또한 그림의 손을 힘주어 잡습니다. 지금 당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림뿐이기도 하고요.
 
유우는 조금 혼란스럽지만, 어쩐지 늘 다녔던 길과 안뜰, 복도와 교실이 새롭게 보입니다. 그림은 유우의 손을 꼭 잡고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나하나 알려주어요. 때때로 유우가 기억하지 못 하는, 두 사람의 추억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유우는 그림만을 잊은 것이지 NRC이나 이 마법 세계에 대해 잊은 건 아닌데도 말이에요. 필사적으로 어른스럽게 굴려는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여서 숨죽여 웃기도 합니다. 양호실에서 눈을 뜬 이후로 줄곤 유우를 괴롭혔던 얕은 불안감이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듯해요.
 
그림은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따라오는 유우가 귀엽습니다.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구~! 라며 가볍게 타박해보기도 하지만,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것이 어미를 따르는 아기 고양이 같아요. 작년 이맘 때 즈음, 자신을 감독하던 유우도 이런 심정이었겠거니 하고 짐작해봅니다. 그 때의 자신은, 음… 사고뭉치 중 사고뭉치였죠. 유우가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어 스스로의 과거를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된다고 해요.
 
소란스러웠던 오후를 정리한 채 낡은 기숙사로 돌아온 두 사람. 잘 준비를 모두 마친 채로 침대에 누운 유우와 달리, 그림은 베개를 들고 유우의 방 밖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 다. 그야, 지금 유우는 그림을 모르는 상태니까요. 낯선 남자아이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은, 유우에게도 큰 부담일 것입니다. 최근에 유우가 피곤해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림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하고 있어요. 유우와 함께인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유우가 피곤해 한다면 그림은 유우에게서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소중한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대마법사가 되기 전에도 지켜주고 싶은 연인인걸요.
 
그런 그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우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옆을 톡톡, 손으로 두드립니다. 이 빌런 소굴에서 살아남은 지 어언 일 년차, 유우도 어느 정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유우에게 있어 그림은 아주 고마운 존재입니다. 만약 NRC에 처음 떨어지고 만 그 날에도 그림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짐작컨대 둘이 함께 한 시간을 생각해 본다면 한 침대에서 자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해요.

그림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침대 안으로 미끄러져 뛰어 들어옵니다. 귀가 쫑긋거리며 한껏 기쁨을 표현하고 있어요. 방의 불이 꺼지고, 어느 덧 밤이 깊은 시각. 그림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끔뻑입니다. 고개를 돌려 보면, 옆에서 유우가 색색대며 자고 있어요. 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는 모양이라, 그림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속삭입니다. 유우가 자신을 잊어도 좋으니, 이대로 자신을 떠나지 말고 오래오래 있어 주었음 한다고요. 오래 전 유우와의 마음을 확인할 때, 유우가 결국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지만…역시 그림은 유우와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대마법사가 되어 유우를 찾아가고 마리라는 목표도 변하지 않았어요. 유우가 어떤 마법-저주-에 걸려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 있으며 저주를 풀 방법은 없는 걸까요. 자신이 왕자님이 아니어서 함께 손을 잡고, 햇살 아래를 걷고, 하다못해 입을 맞추고 몸을 섞어도 저주가 풀리지 않는 것인지… 그림의 귀는 저절로 추욱 처집니다. 하지만 이내 기운을 내고, 전해지지 못할 말을 속삭여요. 자신이 꼭 유우를 찾아가겠다고요. 어느 나라로, 어느 세계로 가던, 하다못해 망각이라는 호수에 빠져도 유우를 구해 올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밤은, 그림의 다짐과 함께 깊어져만 갔습니다…….

추가질문

Q. 기억을 되찾는다면 기간이 얼마나 지난 후인지
A. 기억은 제법 빠르게 돌아옵니다! 나흘 정도 되었을 때 기억의 일부분이 돌아오기 시작하더니, 일주일 즈음 지나자 모든 기억이 돌아왔거든요. 더불어, 자신이 기억을 잃었을 때 그림의 반응이라던가,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까지 모두 기억나기 때문에 한동안 그림을 떠받들어 모시듯 했습니다. 잔뜩 삐친 그림을 달래는 일도 겸해서요.

Q. 기억을 되찾고 난 후의 둘의 반응
A. 유우는 조금 멋쩍어하지만, 그림은 눈물을 뚝뚝 떨굴 정도로 기뻐했어요. 안도와 기쁨, 그간 유우가 자신을 몰라보았던 것에 대한 서러움 등. 유우에게 상황 설명을 하는데 울음이 잔뜩 섞여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새삼스럽게 그림의 안에서 유우가 얼마나 큰 지분을 차지하는지 깨달았어요.
유우는 조금 놀랐어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림이 그렇게 어른스럽게 대처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자신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톡톡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더불어, 자신이 훗날 원더랜드를 떠난다면 그림 혼자 잘 생활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일부 해소된 기분이에요. 시원섭섭한 기분에 그저 미소만 지었다고 합니다.

예콩님